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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북곽

입시 마무리

아무래도 이 글은 올해가 지나기 전에 올려야 할 것 같다.

공부를 지지리도 싫어하는 한 입시생의 푸념, 잡소리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주면 좋겠다.

 

 

사실 나는 3학년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입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성적은 대충 3에서 4등급 정도를 꾸준히 받았었고, 우리 학교에서 이 정도 성적이면 카이스트는 정말 어렵지 않게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계속되는 의욕 저하로 성적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긴 했어도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대학에서 컴공 외의 무언가를 전공하고 싶지 않았기에 서울대 낮공(낮은 공대)은 붙어도 안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에 갑작스럽게 내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남에게 말할 얘긴 아닌 것 같고... 아무튼 내신도 한 학기 남았겠다, 내신 끌어올리면 심층 열심히 준비할 필요도 없겠다, 그래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날 1, 2학년 때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난 공부를 더럽게 안 하는 사람이었다. PS가 너무 재밌었고, 공부가 질리기도 했고, 굳이 열심히 안 해도 중학교 때 쌓아온 게 있어서 성적도 적당히 나오니 굳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를 쉬다가 다시 빡공하려니 쉽지가 않더라. 성적도 막 노력한 만큼 다이나믹하게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최종 성적표를 받고 보니 서울대 낮공은 비벼볼 만했다. 작년에 졸업했다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과고 3학년이 이런 면에서 유리하다는 걸 느꼈다. 우리 학교만 이런 건진 모르겠다. 컴공은 보나 마나 광탈할 거고, 그나마 붙었을 때 고민해볼 만한 수교(수학교육과)를 써야 하나 아니면 일단 공대를 쓰고 붙기라도 해야 하나 엄청 고민했다. 아마 나와 성적이 비슷한 친구들은 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내 마음은 떨어지더라도 관심 있는 과를 쓰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수교와 통계 중에서 어디가 더 가능성 있을지를 재보고 있었다.

 

내가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때, 교회 선생님께서 자전(자유전공학부)을 추천해 주셨다. 그전까지는 자전도 컴공과 마찬가지로 전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후보군에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 3년 동안 해온 게 알고리즘 공부밖에 없어서 통계 쪽 자소서를 작성하는 데에 굉장히 애를 먹고 있었고, 그래서 차라리 자전을 지르고 자소서를 멋들어지게 쓰는 게 더 가능성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마음은 자전으로 굳어졌다. 지금 봐도 정신 나간 선택이었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전 1차가 붙을 거란 기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기대해봤자 그보다 더 큰 아쉬움만이 남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해서, 만약 붙었는데 면접 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그것만큼 억울한 게 없으니까 심층은 꽤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1차가 붙어버렸다. 수능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차 안에서,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결과를 확인한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가 진짜 붙는다고?' 이 생각뿐이었다.

 

나보다 내신이 좋은데도 낮은 과를 쓰고 떨어진 친구가 여럿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고, 친구들에게 괜히 미안했다. 아직 면접이 남았으니까 1차를 붙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 알더라. 진짜 어떻게 안 거지

 

아무튼 나는 신이 주신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심층 면접을 준비했다. 자전은 공대와 다르게 수학 2문제를 30분 안에 풀어야 한다. 보통 소문제의 개수인 7을 만점으로 점수를 계산한다. 나는 6점을 풀고 들어갔고, 나머지 1점을 면접장 가서 열심히 풀다 나왔다. 예상컨대 면접 점수만 놓고 보면 거의 상위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내신으로 1차를 붙었던 터라, 면접에서 만점을 받지 못하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합격했다. 병원에서 독감 검사를 받기 직전에 결과를 확인해서, 검사를 받다가 울 뻔했다. 독감은 다행히 음성 나왔다. 그날 머리가 정말 깨질 듯이 아파서 독감을 의심했었는데, 합격 소식을 듣고 나니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결과 발표의 압박감에서 생긴 두통이었으리라.

 

나는 아직도 내가 서울대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서울대생이라 하면 뭔가 엄청나게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내가 어째서? 이런 느낌이다. 또, 주변의 반응도 조금 부담스럽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줄 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른 대학의 결과도 살짝 자랑해 보자면, 카이스트, 포스텍 최초합, 고려대 컴공 2차 추합, 유니스트 해외연수 장학생, 성균관대 2년 장학생 정도다. 연세대와 한양대 컴공은 끝까지 합격 소식을 듣지 못했다. 연대는 그렇다 쳐도 냥대가 떨어질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냥대 정말 좋아하는 학교였는데 약간 배신감이 느껴진달까.

 

고등학교 공부량에 비해 정말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그 대신 알고리즘을 열심히 판 게 대학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보인 모양이다. 분에 넘치는 결과를 받아버려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괜히 미안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대학 조금 못 가도 인생 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대학 간판이 아니라 대학에 가서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다' 같은 말은 함부로 못 하겠다. 그래도 다 재능 있는 친구들이니 어떻게든 성공한다는 것을 스스로 믿었으면 좋겠다.

 

대입과 교내 대회가 끝나고 나니 thinking을 하기가 싫어졌다. 분명 미친 듯이 PS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림도 없었고, 요즘은 온라인 체스를 하거나 애니를 정주행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학 가기 전에 빨리 PS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전혀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아마 졸업하고 심심해지면 그때 다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 역대상 4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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